안토니오 다 코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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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토니오 다 코레조는 1489년경 이탈리아 코레조에서 태어난 르네상스 시대 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원근법을 활용한 독창적인 표현과 부드러운 회화 기법, 감미로운 색채가 특징이다. 초기에는 만토바에서 활동하며 안드레아 만테냐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파르마로 이주하여 프레스코 벽화와 천장화를 제작하며 명성을 얻었다. 대표작으로는 《성 파올로의 방》, 《성모 승천》, 《유피테르와 이오》 등이 있으며, 종교화와 신화화를 넘나들며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그의 예술은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양식에 영향을 미쳤고, 후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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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다 코레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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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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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안토니오 알레그리 (Antonio Allegri) |
출생일 | 1489년 8월 |
출생지 | 코레조, 모데나 에 레조 공국 |
사망일 | 1534년 3월 5일 |
사망지 | 코레조, 모데나 에 레조 공국 |
국적 | 이탈리아 |
분야 | 프레스코, 회화 |
사조 | 성기 르네상스, 매너리즘 |
배우자 | 1519년 결혼, 1529년 사별 - 지롤라마 프란체스카 디 브라게티스 (Girolama Francesca di Braghetis) |
교육 | |
사사 | 로렌초 알레그리, 프란체스코 비안키 페라리 |
영향 | |
영향을 준 인물 | 안드레아 만테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산치오, 로렌초 코스타, 조르조네 |
주요 작품 | |
작품 | 『유피테르와 이오』 『성모 승천』 『레다와 백조』 『다나에』 『가니메데스의 약탈』 『성 히에로니무스의 성모』 『양치기의 경배』 |
파르마 대성당 | 천장화 |
2. 생애
코레조는 1489년 8월경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의 코레조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토니오 알레그리(Antonio Allegri)이지만 출생지를 따서 코레조라고 불린다. 그의 초기 생애는 불분명하지만, 레조넬에밀리아의 화풍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1506년경 만토바로 이주하여 로렌초 코스타, 안드레아 만테냐 등의 영향을 받았다. 1519년경 파르마로 이주하여 파르마 성 파올로 수도원의 프레스코 벽화 《성 파올로의 방》을 제작했다. 1520년부터는 파르마 성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성당의 원형 천장 벽화 《파트모스의 성 요한의 환시》, 1526년부터는 파르마 대성당의 원형 천장 벽화 《성모 승천》을 제작했다. 코레조가 제작한 벽화는 단축법의 효율적인 사용과 천장에 뚫린 구멍에서 진짜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착시 효과를 노린 독자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이 특징이다.[7]
코레조의 대표적인 종교화로는 《스칼라의 성모》, 《성 히에로니무스의 성모》, 《성스러운 밤》, 《성 조르조의 성모》가 있다. 이 작품들은 감미로운 표정, 종교적인 숭고함, 현세적인 희열을 결합한 표현이 특징이다. 코레조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그리스·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도 제작했는데, 《비너스와 큐피드와 사티로스》, 《다나에》, 《레다와 백조》, 《유피테르와 이오》, 《독수리에 납치된 가니메데》가 이에 해당된다.
코레조의 화법은 관능적인 정서, 역동적인 구성, 환상적인 관점, 극적인 단축이 특징인데, 이는 16세기 매너리즘 미술, 17세기 바로크 미술, 18세기의 로코코 미술로 이어지게 된다.
코레조는 1534년 3월 5일에 자신의 고향인 코레조에서 사망했는데,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파르마에서 그림 제작 보수로 구리 동전 60개를 받은 코레조는 그것을 고향으로 가져가려고 구리 동전을 등에 지고 걸어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햇볕에 지친 그가 물을 마신 후 흉막염에 걸려 심한 열로 쓰러져 그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27] 그의 무덤 위치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2. 1. 초기 (1500년대 초-1518년)
코레조는 1503년부터 1505년까지 모데나에서 프란체스코 비안키 페라라에게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로렌초 코스타와 프란체스코 프란차와 같은 예술가들의 고전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4] 1506년 만토바로 이주한 후, 코레조는 안드레아 만테냐의 엄격한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510년까지 만토바에 머물렀다.[17]
코레조의 초기 중요한 작품으로는 브레라 미술관의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한 성 엘리사벳과 성 요한』(1513년-1514년경)과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의 『성 프란체스코의 성모』(1514년-1515년경)이 있다. 이 작품들은 만테냐의 영향을 보여주며, 특히 『성 프란체스코의 성모』는 루브르 박물관의 『승리의 성모』를 모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동시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라파엘로, 로렌초 코스타의 영향도 보여준다.[19]
코레조는 만테냐의 엄격한 예술에서 벗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흡수하여 부드러운 회화 표현과 감미로운 색채를 얻었다.[17] 1516년 이후, 코레조는 다 빈치의 영향을 받은 성모자상을 많이 그렸다.[20] 프라도 미술관의 『성모자와 아기 성 요한』(1516년경)과 스포르차 성 미술관의 『성모자와 아기 성 요한』(1514년-1517년경)은 다 빈치의 영향을 보여준다. 전자는 『암굴의 성모』를,[19] 후자는 『실 잣는 성모』를 연상시킨다.[21]
우피치 미술관의 『성 프란체스코가 있는 이집트로의 도피 중 휴식』(1517년-1520년경)과 에스테 미술관의 『캄폴리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의 양식이 더욱 세련되고 색채가 감미로워졌다. 이 시기 중요한 작품으로는 브레라 회화관의 『동방 박사의 경배』와 국립 카포디몬테 미술관의 『성 카타리나의 신비로운 결혼』이 있다.
2. 2. 중기 (1518년-1530년)
코레조는 파르마에서 활동하며 예술적 성숙기를 맞이했다. 1519년에는 산 파올로 수녀원 천장화 (카메라 디 산 파올로)를 제작했는데, 이는 장난기 넘치는 아기 천사들이 엿보는 듯한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7]1520년부터 1524년 사이에는 파르마의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교회의 돔에 파트모스의 성 요한의 환시를 그렸다. 이 작품은 단축법과 착시 효과를 활용하여 마치 천장이 열리고 하늘이 보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7] 3년 후에는 파르마 대성당의 돔에 성모 승천을 그렸는데, 이 역시 단축법을 사용하여 인물들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역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7] 이러한 기법은 이후 바로크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코레조는 종교적인 체험, 특히 개인적인 내적 환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대표작으로는 애도의 예수와 네 명의 성인 순교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냈다.[8]
2. 3. 후기 (1530년-1534년)
코레조는 말년에 파르마 대성당에 단축법을 활용한 천장화 《성모 승천》(1526-1530년)을 제작하여 천장화 표현의 극치를 보여주었다.[16] 대표적인 종교화로는 《목자들의 경배》(1528년), 《성 히에로니무스의 성모》(1529년경) 등이 있다. 또한, 코레조는 신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큐피드의 교육》, 《잠자는 비너스와 큐피드, 사티로스》 등을 그렸다.코레조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묘사된 대로 ''유피테르의 사랑'' 연작을 구상했다. 이 관능적인 연작은 만토바의 페데리코 2세 곤차가가 의뢰한 것으로, 테 궁전의 개인적인 오비디우스 방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주어져 완성된 지 몇 년 만에 이탈리아를 떠났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1753년에 구입한 ''레다와 백조''는 현재 베를린의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여러 사건이 뒤섞여 있다. 중앙에는 레다가 백조를 타고 있고, 오른쪽에는 수줍지만 만족한 처녀가 있다. 현재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다나에''는 처녀가 금빛 신성한 비의 장막에 의해 임신되는 모습을 묘사한다. 시트가 반쯤 가린 하반신을 하고 있는 다나에는 티치아노가 1545년에 그린 동일한 주제의 작품보다 더 조신하고 기뻐 보인다. 티치아노의 작품에서는 비가 더 정확하게 화폐적이다. 한때 ''안티오페와 사티로스''라고 불렸던 그림은 현재 ''비너스와 큐피드와 사티로스''로 정확하게 확인되었다.
''독수리에 납치된 가니메데''는 젊은 남자가 문자 그대로 사랑에 빠진 채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묘사한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와 독수리의 결합을 복음 전도자 요한의 은유로 해석했지만, 이 그림과 다른 그림들의 에로틱한 맥락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이 그림과 그 짝인 걸작 ''유피테르와 이오''는 빈의 쿤스트히스토리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페데리코 2세 곤자가가 의뢰한 4개의 신화 그림 중 하나인 ''독수리에 납치된 가니메데''는 움직임, 드라마, 사선 구도의 배치를 묘사하여 원시적인 바로크 작품이다.
코레조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파르마에서 그림 제작의 보수로 구리 동전 60개를 받은 코레조는 그것을 고향으로 가져가려고 구리 동전을 등에 지고 걸어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햇볕에 지친 그가 물을 마신 후 흉막염에 걸려 심한 열로 쓰러져 그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27] 1534년 3월 5일의 일이었다. 코레조는 젊은 시절 제단화를 그렸던 고향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매장되었다.[28]
3. 양식
코레조의 화법은 관능적인 정서, 역동적인 구성, 환상적인 관점, 극적인 단축이 특징이며, 이는 16세기 매너리즘 미술, 17세기 바로크 미술, 18세기의 로코코 미술로 이어졌다.[7] 특히 천장화에서 단축법을 사용하여 공간을 혁신적으로 구성하고, 보는 이에게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표현은 이후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하여 부드러운 윤곽선과 감미로운 색채를 표현했다. 종교화에서는 등장인물의 종교적 체험, 특히 개인적인 내적 환희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코레조는 파르마 대성당 돔의 천장에 있는 성모의 비행은 그 시대의 세속적, 종교적 궁궐의 많은 무대 장식에 영감을 주었다. 그의 환상적인 실험은 상상의 공간이 자연적 현실을 대체하는 것으로,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양식적 접근의 많은 요소를 예고하는 듯하다.[9]
4. 주요 작품
코레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종교화와 신화화가 있다.
종교화 | 신화화 |
---|---|
- ''유디트와 하녀'' (c. 1510)—캔버스에 유화, 스트라스부르 미술관, 스트라스부르
- ''성 엘리자베스와 성 요한 세례자와 함께 있는 성 가족'' (c. 1510)—패널에 유화-파비아 시민 박물관, 파비아[10]
- ''성 카타리나의 신비한 결혼'' (1510–1515)—미국 국립 미술관, 워싱턴 D.C.
- ''마돈나'' (1512–14)—캔버스에 유화, 스포르체스코 성, 밀라노
- ''성 프란체스코와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 (1514)—나무에 유화, 299cm × 245cm, 알테 마이스터 갤러리, 드레스덴
- ''아기와 함께 있는 마돈나'' (미상, 1500년대 초)—캔버스에 유화, 외국 미술 국립 갤러리, 소피아
- ''알비니아의 마돈나'' (1514, 분실)
- ''아기 성 요한 세례자와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 (1514–15)—나무 패널에 유화, 45cm × 35.5cm,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멜버른
- ''아기 성 요한 세례자와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 (c. 1515)—패널에 유화, 64.2cm × 50.2cm, 시카고 미술관, 시카고
- 성 예로니모와 함께 있는 성 가족 (1515)–햄프턴 궁전의 왕실 컬렉션 일부인 이스트 클로짓
- ''어린 성 요한과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 (1516)—캔버스에 유화, 48cm × 37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11]
- ''동방 박사의 경배'' (c. 1515–1518)–캔버스에 유화, 84cm × 108cm, 브레라 회화관, 밀라노
- ''성 예로니모'' (c. 1515–1518)–Oil on Wood영어 64cm x 51cm,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 마드리드[12]
- ''아기 성 요한 세례자와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 (1518)–Oil on panel영어, 48cm x 37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 ''부인의 초상화'' (c. 1517–1520)—캔버스에 유화, 103cm × 87.5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 산 파올로 방의 프레스코 (1519)—파르마 산 파올로 수도원
- ''이집트 도피 중의 휴식과 성 프란체스코'' (c. 1520)—캔버스에 유화, 123.5cm × 106.5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남자의 초상'' (c. 1520)–캔버스에 유화, 55cm x 40cm, 티센보르네미사 국립 미술관, 마드리드[13]
- ''성 요한의 죽음'' (1520–1524)—프레스코, 파르마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 ''스칼라의 성모'' (c. 1523)—프레스코, 196cm × 141.8cm, 파르마 국립 미술관
- ''네 성인의 순교'' (c. 1524)—캔버스에 유화, 160cm × 185cm, 파르마 국립 미술관
- ''천사와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밀크의 마돈나)'' (c. 1524)—나무에 유화, 68cm × 56cm, 부다페스트 미술관, 부다페스트
- ''십자가에서 내려짐'' (1525)—캔버스에 유화, 158.5cm × 184.3cm, 파르마 국립 미술관
- ''날 만지지 마세요'' (c. 1525)—캔버스에 유화, 130cm × 103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14]
- ''에체 호모'' (1525–1530)—캔버스에 유화, 국립 미술관, 런던
- ''스콜델라의 마돈나'' (1525–1530)—캔버스에 유화, 216cm × 137cm, 파르마 국립 미술관
- ''아기의 경배'' (c. 1526)—캔버스에 유화, 81cm × 67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성 카타리나의 신비한 결혼'' (1520년대 중반)—나무, 105cm × 102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성모 승천'' (1526–1530)—프레스코, 1093cm × 1195cm, 파르마 대성당
- ''성 예로니모의 마돈나'' (1527–28)—캔버스에 유화, 205.7cm × 141cm, 파르마 국립 미술관
- ''수성과 큐피드와 함께 있는 비너스 (사랑의 학교)'' (c. 1528)—캔버스에 유화, 155cm × 91cm, 국립 미술관, 런던
- ''사티로스와 함께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 (c. 1528)—캔버스에 유화, 188cm × 12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탄생'' (''목자들의 경배'', 또는 ''거룩한 밤'') (1528–1530)—캔버스에 유화, 256.5cm × 188cm, 알테 마이스터 갤러리, 드레스덴
- ''성 조지와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 (1530–1532)—캔버스에 유화, 285cm × 190cm, 알테 마이스터 갤러리, 드레스덴
- ''다나에'' (c. 1531)—패널에 템페라, 161cm × 193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 ''독수리에게 납치된 가니메데'' (1531–32)—캔버스에 유화, 163.5cm × 70.5cm, 빈 미술사 박물관, 빈
- ''주피터와 이오'' (1531–32)—캔버스에 유화, 164cm × 71cm, 빈 미술사 박물관
- ''백조를 든 레다'' (1531–32)—캔버스에 유화, 152cm × 191cm, 베를린 국립 박물관, 베를린
- ''미덕의 알레고리'' (c. 1531)—캔버스에 유화, 149cm × 88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악덕의 알레고리'' (c. 1531)—캔버스에 유화, 149cm × 88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4. 1. 종교화
코레조는 종교화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성 파올로의 방》 (1519년경, 파르마 성 파올로 수도원): 수녀원장의 개인실 천장 장식으로, 장난기 넘치는 아기 천사들이 엿보는 눈구멍이 뚫린 덩굴과 고전적인 대리석 조각 이미지를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이다.
- 《복음사가 요한의 예지력》 (1520-1521년, 파르마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성당): 돔에 그린 환상적인 작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십이 사도와 사대 교부, 세라핌과 하늘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았다.
- 《스칼라의 성모》 (1525-1530년경, 파르마 국립 미술관): 1523년경에 산 미켈레 문에 있는 마리아 베르지네 기도소에 제작한 벽화이다.
- 《성모의 승천》 (1526-1530년, 파르마 대성당): 돔에 그린 작품으로, 멜로초의 원근법(''sotto in su'', 아래에서 위로)을 사용하여 층층이 쌓인 인물들을 표현했다. 소용돌이치는 관객들의 집합과 건축 지붕 평면의 환상적인 소멸, 신성한 무한을 향한 돌진하는 원근법은 전례 없는 장치였다.
- 《성 히에로니무스의 성모》 (1527-1528년경, 파르마 국립 미술관): 성모, 아기 예수, 막달라 마리아, 천사 등의 감미로운 표정 속에 종교적 숭고함마저 표현한 대표작이다.
- 《성스러운 밤》 (1528-1530년경, 드레스덴 미술관): 《목자들의 경배》로도 불리며, 서양 회화에서 최초의 야경화로 여겨진다.
- 《성 조르조의 성모》 (1530-1532년경, 드레스덴 미술관): 성 게오르기우스의 성모를 그린 종교화이다.
이 외에도 코레조는 파르마 국립 미술관에 소장된 ''애도의 예수''와 ''네 명의 성인 순교'' 등 많은 종교화를 남겼다. ''애도의 예수''는 이 시기 이전의 이탈리아 회화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광채를 보여준다.[8] ''순교''는 베르니니의 ''진실''과 에르콜레 페라타의 ''성 아녜스의 죽음''과 같은 후기 바로크 구성과 유사하며, 기뻐하는 성인이 순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8]
4. 2. 신화화

코레조는 종교 작품 외에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유피테르의 사랑'' 연작을 그렸다. 이 관능적인 그림들은 만토바의 페데리코 2세 곤차가가 의뢰한 것으로, 테 궁전의 오비디우스 방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선물로 주어져 이탈리아를 떠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1753년에 구입한 ''레다와 백조''는 현재 베를린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여러 사건이 함께 묘사되어 있다. 중앙에는 레다가 백조를 타고 있고, 오른쪽에는 수줍지만 만족한 처녀가 있다.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에 있는 ''다나에''는 금빛 신성한 비의 장막에 의해 처녀가 임신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트에 하반신이 반쯤 가려진 다나에는 티치아노가 1545년에 그린 같은 주제의 작품보다 더 조신하고 기뻐 보인다. 티치아노의 작품에서는 비가 더 현실적인 화폐처럼 보인다. 한때 ''안티오페와 사티로스''라고 불렸던 그림은 현재 ''비너스와 큐피드와 사티로스''로 정확하게 확인되었다.[26]
''독수리에 납치된 가니메데''는 젊은 남자가 사랑에 빠진 채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묘사한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와 독수리의 결합을 복음사가 요한의 비유로 해석했지만, 이 그림과 다른 그림들의 에로틱한 맥락을 고려할 때 가능성은 낮다. 이 그림과 짝을 이루는 걸작 ''유피테르와 이오''는 빈의 쿤스트히스토리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페데리코 2세 곤차가의 의뢰로 제작된 4개의 신화 그림 중 하나인 ''독수리에 납치된 가니메데''는 움직임, 드라마, 사선 구도의 배치를 묘사하여 초기 바로크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5. 평가
Correggioit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어둡고, 우울하며, 내성적인 인물로 기억되었다. 그는 수수께끼 같고 절충적인 예술가였으며, 특별한 도제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테냐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받았지만, 도제를 통해 직접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혁신적이었고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9]
조르조 바사리는 Correggioit가 더 나은 화가가 되기에는 "로마"적인 경험이 부족했다고 생각했지만, Correggioit를 롬바르디아의 근대 양식(마니에라 모델나)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바사리는 Correggioit가 고대나 현대의 최고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그러했지만, 만약 그것들을 보았다면 필연적으로 그는 자신을 크게 개선하고, 훌륭한 것을 더욱 훌륭한 것으로 바꾸어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바사리는 Correggioit 외에 색채를 능숙하게 다룬 사람은 없었고, 그가 육체에 담은 색채의 부드러움, 그리고 그가 작품을 완성한 우아함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위대한 섬세함 또는 더 큰 평안함을 그림에 부여한 사람은 없다고 평가했다.[27]
17세기와 18세기에는 색채에 뛰어난 롬바르디아파의 으뜸으로 평가받으며 찬사를 받았다. 18세기 이후 Correggioit에 대한 평가는 더욱 높아졌다. 아구키는 이탈리아 회화를 로마파, 베네치아파, 롬바르디아파, 토스카나파의 4개로 나누고, Correggioit를 색채에 뛰어난 롬바르디아파의 으뜸으로 삼았다. 알가로티는 Correggioit와 파르미자니노를 《우아함》에서 고대 그리스의 화가 아펠레스에 필적한다고 평가했다. 베티넬리도 Correggioit는 스승도 교과서도 없었지만, 수련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칭찬했다.[30]
안톤 라파엘 멩스는 『라파엘로, Correggioit, 티치아노에 관한 고찰』에서 Correggioit의 명암 표현이 숭고하다고 평가했다.[31] 또한 멩스는 Correggioit가 로마에 가서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예술을 흡수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32]
현대에는 혁신적인 공간 구성과 착시 효과를 만들어 낸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그의 작품은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Correggioit의 환상적인 실험은 상상의 공간이 자연적 현실을 대체하는 것으로,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양식적 접근의 많은 요소를 예고하는 듯하다.[9]
6. 영향
코레조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어둡고, 우울하며, 내성적인 인물로 기억되었다. 수수께끼 같고 절충적인 예술가인 그는 특별한 도제 과정을 거치지 않은 듯하다. 그의 작품에는 만테냐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9] 코레조는 도제를 통해 직접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작품은 혁신적이었고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코레조의 환상적인 실험은 상상의 공간이 자연적 현실을 대체하는 것으로,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양식적 접근의 많은 요소를 예고하는 듯하다. 그는 조반니노 디 폼포니오 알레그리 (1521–1593)와 같은 예술적 후손들을 길러낸 것으로 보인다.[9] 파르마 외부에는 직접적인 제자가 없었지만, 조반니 마리아 프란체스코 론다니, 파르미자니노, 베르나르도 가티, 프란체스코 마돈니나, 조르지오 간디니 델 그라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9]
확실하게 제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적으며, 화가인 아들 폼포니오 외에 프란체스코 카펠리(Francesco Capelli), 조반니 지아롤라(Giovanni Giarola), 안토니오 베르니에리(Antonio Bernieri)가 있으며, 특히 뛰어난 화가로는 베르나르디노 가티(Bernardino Gatti)가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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